언어 밖에서 - 김노암(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 2014
작업들은 소통이라는 주제를 중점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소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언어를 통한 소통이 아닌 언어가 배제되어 있는 비언어적인 소통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나의 작업을 통해 이러한 비언어적 소통의 역할과 가능성들을 탐구한다. - 작가노트
신뢰가 무너진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들 간의 관계와 상호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 소통을 위한 모든 기반이 와해되어 버리면 이미지를 다루는 예술가들은 어떤 태도와 실천으로 대응해야하는가.
인간이 발 딛고 서있는 대지가 사라져버린다면 당연히 인간도 사라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로 언어로서 사유하고 존재하는 인간에게 언어가 어떠한 문법도 없이 그 의미가 해체되어 버린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일 실제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도록 가능케 하였던 언어가 그 의미를 상실한다면 그 후에는 비언어적 소통의 방식을 찾아야하는 것이 아닌가. 박승원의 작업은 이 지점, 상식과 일상과 정상 언어의 밖에서 출발한다.
박승원은 비언어적인 소통의 가능성과 역할을 모색한다고 말한다. 박승원의 중요한 창작의 도구는 소통을 위해 특화된 언어 이외의 모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몸과 움직임과 소리다. 게다가 그것들은 매우 불편하거나 괴로운 감정을 동반한다. 비언어적 소통이란 결국 기존에 익히 알고 있었던 인간, 문화로부터 벗어난 뭐라고 언어화할 수 없는 그저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상태로 재현된다. 그의 작업은 그것을 생각하고 실현하는 일련의 작업과정을 기록한 사진이미지와 비디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재연하는 인간의 몸짓이 기획되고 기록된다. 컨텍스트에 얹어졌을 때에만 비밀스런 의미를 살짝 보여주는 것이다.
박승원의 작업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몸짓 또는 슬랩스틱은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는 또는 그 문제를 소통하는 통로가 막혔을 때 우스꽝스럽게 벌어지는 인간군상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역설적으로 너무 깊은 비애는 희극으로 표현된다. 황폐화된 사회의 정신은 정확하고 명징하게 진술될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 불분명하고 탁한 상태에서 어떤 징조처럼 나타날 뿐이다.
일상어의 관계를 일탈하는 인간의 몸짓은 그 자체로 문제의 장소이다. 작가는 희비극의 심리극 형태로 반복해서 독해되지 않는 상태의 신호를 발신한다. 번민과 착란, 분명한 의미와 무의미가 뒤섞인 영혼의 몸짓. 그에게 예술은 무의미, 의미의 경계, 의미의 밖을 배회하며 의미를 모색하는 기묘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다. 마치 무미건조한 꿈을 꾸는 사람의 강박적 운동을 보여준다. 몸짓의 콜라주, 고르지 않은 화면으로 보여주는 뚝뚝 끊어진 몽타주의 영상이 반복된다. 그의 이미지들은 의미가 죽어버린, 문법을 상실한 문장, 순서가 뒤죽박죽된 원고 같다. 안정적인 대화로 복귀하는 시간이 좀처럼 오지 않는 상태의 움직임. 바보들의 헛수고를 기록한 우화집. 이런 뉘앙스의 작업은 대체로 잘 설계된 실수, 의도된 혼선의 형태로 나타난다.
박승원은 자신의 작업에서 유머러스한 요소를 매우 중요하게 사용하는데, 프로이드에 따르면 유머는 공격성을 위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공격성을 숨기고 있는 유머는 상대방의 공격을 사전에 줄이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공격성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성공적인 유머는 공격성이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마치 게임처럼 스릴 있게 공격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실패한 유머는 숨김없이 공격적이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프로이드의 해석을 적용해보면 박승원의 유머 또한 마치 게임을 하듯 드러남과 감춤 사이의 긴장을 유희해야 성공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다.
박승원의 유머가 프로이드식의 해석에 부합하던 그렇지 않던 그의 유머에서 어떤 공격성과 상관없이 어두운 그늘과 깊은 우울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직업적 코미디언이 흔히 귀가(歸家) 후에 보여주는 침묵과 우울의 분위기를 생각해보라. 또 카프카의 굶는 재주로 사는 광대를 떠올려 보라. 물론 굶는 재주를 보여주는 광대는 결코 그 재주로 먹고 살수 없는 것이다. 굶는 재주는 필연적으로 (굶어)죽는 재주 인 것이다. 달리 도리 없이 굶는 제주로 먹고살 수밖에 없었던 광대의 기이한 역설. 어쩌면 본래 예술은 매우 유머러스한 죽음의 제의일 것이다. 죽음의 제의와 흐트러진 감정 상태인 유머러스함의 괴상한 결합을 떠올려 보라. 박승원의 활달한 퍼포먼스는 그러기에 결코 밝거나 가볍지 않다. 마치 돌을 매단 몸짓처럼 보인다. 그 몸짓은 활달하면 할수록 더욱더 가라않을 수밖에 없는 몸짓이다.
일반적으로 20세기에 등장한 현대미술의 퍼포먼스와 비디오아트 등은 미술과 연극 또는 무용과 영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규정적이며 독립적인 분야로 이해되고 있는데, 박승원의 일련의 작업들은 다양한 예술들에 걸쳐있다. 동시에 전통적이며 안정적인 형식과 서사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보인다. 마치 20세기를 관통한 전위예술 또는 실험예술이라 이름으로 성취된 신화나 형태의 재연이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과정으로 보인다.
박승원은 문제의 장소, 최초의 사건으로 되돌아가려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재기발랄한 예술현상에서 벗어나 그 밑에 짙게 깔려있는 어떤 근원적인 상태, 기원을 기억하려는 제의로서의 예술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속도를 따르지 못한다고 한다. 너무도 빠르게 변한 문명을 사는 인간의 몸은 실상은 원시 수렵시대의 인간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인간의 몸짓은 항상은 아니지만 어느 조건이 갖춰지면 그 간극을 드러낸다. 박승원의 몸짓은 필연적인 또는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동시에 불가능한 또는 불가사의한 시도이기도 하다.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지구를 들러 올리기 위해 구상했던 어떤 확실한 점(장소)를 찾았던 것처럼 말이다. 자기 자신의 탄생의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많은 예술가들이 바로 그 탄생의 순간을 기억해내려 한다. 박승원 또한 그 대열에 참여한다.
결국 다시 돌아가야 할 장소는 ‘소통’이다. 그리고 그 소통은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다.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 원활할 때 자기 자신의 진면목, 정확한 실체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위 ‘참자아(眞我)’ 또는 ‘자기’의 발견이 아니고서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소통이 문제라고 말할 다른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