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남자 - 임보람(큐레이터), 2022
I. 한여름의 태양 빛이 담을 넘어 반지하 계단 아래의 갤러리 유리문 안으로 길게 들어왔다. 이 시간이면 안으로 들어온 빛이 실내를 한 번 어루만지고 곧 나갈 채비를 할 때다. 입구에서 문을 붙잡고 멍하니 빛을 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배 한 대 태우시죠.”
D가 돌아보자, 어깨 위에 장난감 앵무새를 매달고 얼굴에는 원숭이 가면을 쓴 태희가 서 있었다.
* * *
갤러리에 들어선 태희가 장난감 앵무새를 어깨에서 떼 내어 창틀에 올려두고, A4 크기의 서류첩을 열더니 정성스럽게 그림을 한 장 한 장 꺼내어 펼친다. 그림 사이사이 끼워 두었던 간지를 아래에 받쳐 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조심스러운 손동작이다. 태희는 같은 크기의 그림들을 테이블 두 개 위에 늘어놓다가, 바닥으로 내려가 또 늘어놓기 시작한다.
“생전 안 그리던 그림을 마흔 장 넘게 그렸어요. 내가 십 년 넘게 그림 말고 다른 미술 했는데, 이제 와 그림을 그리게 될 줄이야. 신기하기도 하고.”
“왜요, 태희씨 대학 전공은 회화잖아요?”
“그래도 한 번도 그림으로 활동한 적 없어요. 처음 계획에는 없던 일이지만 그래도 이번에 책을 내게 되었으니까….”
책이라는 단어를 말하기가 쑥스러웠는지, 태희가 조금 수줍게 웃는다.
“이제 겨우 시작인걸요.”
“마치 연극 같군요.”
“서커스 같아요.”
“뮤직홀 같아요.”
“서커스 같다니까요.”
D는 책이라는 단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을 애써 외면한다. 태희는 아버지의 생전에 기록해 두었던 두 사람의 대화를 바탕으로 희곡을 한 편 썼다고 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희곡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고 했다. D는 개인전과 더불어 태희가 쓴 원고를 단행본으로 출간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제안을 했다. 고질병처럼 D의 불안하고 무모한 제안이 또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고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
“아무것도 약속은 못하겠다는 거죠.”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거예요.”
“맑은 정신으로.”
“가족들하고 의논도 하고요.”
“친구들하고도.”
“은행 통장하고도.”
“그래야 결정을 내리겠다는 거예요.”
“그건 당연하죠.”
“하긴 안 그렇겠어요?”
“그런 것 같네요.”
“내 생각도 그래요.”
* * *
업계에서 태희는 원숭이 남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모습을 나타낼 때면 항상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인데, 아무도 그의 진짜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여기 이 미술판에 공공연히 떠도는 소문이었다. 평단에서는 그의 기행에 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어떤 이는 ‘관습과 훈육으로 형성된 인간성을 지우기 위해 원숭이 되기로서 자유를 갈구한다’고 했고, 어떤 이는 ‘문명화하지 않은 원초적 행위로서 이성 중심의 사회 질서에 인식의 전환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와 함께 시립의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해 있었던 모 작가는 그의 이름보다도 ‘원숭이 남자’를 더 기억했다. 원숭이 가면을 쓴 태희의 퍼포먼스는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으로서의 몸짓을 경험하길 원했고, 그리하여 원숭이 남자의 존재는 태희를 대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믿었다는 편이 옳겠다. 그러나 언젠가 D가 원숭이 가면을 쓰는 이유를 태희에게 물었을 때, 그의 변은 꽤 명료했다.
“나는 원숭이를 좋아하거든요.”
* * *
그날 오후, 태희는 신체와 움직임, 생명력과 기계에 관해 열변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열세시간 낭독하는 동안 빛과 생명력이 소멸되어 간다는 것을, 공중에 매달린 신체의 파편을, 그것이 자신이어야 함을 이야기했다. 결국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지극히 평범한 하루」는 부조리극이었다. 그리고 극의 주인공은 태희 자신이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창틀에 올려두었던 장난감 앵무새가 갑자기 입을 열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블라디미르도 될 수 있고 에스트라공도 될 수 있어. 여차하면 고도씨의 심부름을 하는 소년이 될 수도 있지.”
D가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 장난감이 말을 한 거야?’
태희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태연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서커스 같군.”
앵무새가 내뱉었다.
D는 이 낡고 눅눅한 반지하 갤러리 안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평행하게 뻗어 있는 서로 다른 시공간의 축에서 한쪽에는 자신의 정신과 앵무새만이 존재하고, 자신의 육체와 원숭이 남자는 다른 한쪽에 있는 것 같았다.
앵무새는 쉬지 않고 말했다. 말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나는 언제까지고 말을 할 수 있어. 다만 건전지가 남아있어야 하지.”
D가 물었다.
“이봐 앵무새, 블라디미르, 아니 에스트라공, 아니 뭐든. 너는 원숭이 남자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야?”
앵무새가 코웃음을 쳤다.
“바보같으니. 나는 장난감이라고. 스스로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원숭이 남자의 세계에서는 그저 그의 말을 흉내낼 뿐이야.”
“하지만 너는 지금 내게 스스로 말을 하고 있어!”
“여긴 너의 세계이니까. 착각과 혼돈의 세계. 불안한 자들의 세계.”
앵무새가 우갤갤갤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장난감 앵무새가 고개를 흔들며 말을 쏟아내는 동안 D는 태희의 말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태희의 입이 움직이는 모양을 응시해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원숭이 남자는 건너편의 세계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제발 입 좀 다물어!’ D가 외쳤지만 D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D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순간 앵무새가 기기긱하고 기계음을 내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말도 멈추었다.
‘건전지를 다 쓰고 결국 방전된 것인가?’
이윽고 태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제가 관심 있는 것은 원숭이 되기에요. 몸짓이라는 것은 에너지의 교류를 통해 생성되어야 하는데, 원숭이의 본능적 행위는 자기애적 심리를 반영하거든요. 원숭이의 행위야말로 호모 아르텍스, 예술적 인간의 발현이라고요.”
태희의 입이 움직이면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D는 장난감 앵무새가 말을 멈춘, 태희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불안한 자들의 세계에서 장난감 앵무새가 쉼 없이 고개를 흔들며 떠들었던 것처럼, 이쪽 세계에서는 태희가 쉼 없이 원숭이 남자의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동물, 기계, 죽음을 몸으로 체현해요.”
“나는 원숭이가 되고, 사자가 되고, 막대기가 되었다가, 검은 발로 변해요.”
“몸은 공공의 규칙과 사적인 욕구가 가장 극렬하게 충돌하는 장이죠.”
“나는 아버지의 몸이 검게 변해가는 걸 보면서 내 몸이 검게 변하는 환상에 사로잡혀요.”
“아버지의 숨은 날개를 퍼덕이는 비둘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내 몸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변해가요.”
“망상은 어쩌면 현실일지도 모르겠어요.”
태희가 이야기를 멈추고 창틀에 놓인 장난감 앵무새를 잠시 바라보다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다.
“한물간 작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네?”
“저는 그렇게 불리더라도 상관없어요.”
두 사람은 적당한 다음 말을 찾지 못한다. 모든 죽은 자들의 목소리, 날개 치는 소리, 나뭇잎 소리, 모래 소리가 들린다. 침묵 속에서, 모두가 한꺼번에 지껄인다. 저마다 혼자 지껄인다. 아니, 소곤거린다. 중얼거린다. 살랑거린다. 제 인생의 얘기를 한다. 살았던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그 얘기를 꼭 해야 한다.
D가 말한다.
“그만 가요.”
태희가 대답한다.
“가면 안 되죠.”
D가 고개를 돌려 태희를 본다.
“왜요?”
태희가 D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한다.
“고도를 기다려야죠.”
D가 짧게 숨을 쉰다.
“참, 그렇죠.”
어느새 황혼이 다가온다. 한풀 꺾인 태양 빛이 오렌지색 담벼락을 비추고, 그로부터 반사된 오렌지색 햇살이 갤러리 창문을 물들이고 있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요.”
(끝)